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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백의총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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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념관
  • 칠백의사순의탑
  • 홍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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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의문
  • 종용사
  • 의총
  • 칠백의총
  • 칠백의총(七百義塚)

    1592년 8월 18일(음력) 조국강토를 지키기 위해 의병장 조헌선생, 의승장 영규대사 등 칠백의사가 금산 연곤평에서 만오천여 명의 왜적과 맞서 싸우다 모두 순절하자 조헌선생의 제자인 박정량, 전승업 등이 그분들의 유해를 거두어 만든 무덤이다.

  • 종용사
  • 종용사(從容祠)

    임진왜란 당시 금산 싸움에서 순절하신 선열들의 영혼을 모신 21위(位)의 위패가 안치되어 있다. 1647년 당시 호서·호남지방의 유림에 의하여 사당이 건립되었고, 1663년 현종께서 “종용사”라 사액하셨다. 1940년 일제의 항일유적 말살정책에 따라 훼손되었다가 1952년 복원되었고, 1971년 재건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취의문
  • 취의문(取義門)

    칠백의총의 내삼문(內三門)에 해당하는 문으로 의총문과 종용사 사이에 위치해 있다.


    취의문(取義門) 역시 1971년에 실시된 제1차 정화 공사 때 새로 지어졌다. 이 문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솟을 대문으로 철근 콘크리트조 맞배 지붕 초익공 건물이다.

  • 중봉조선생일군순의비
  • 순의비

    의병장 조헌선생이 이끄는 칠백의사가 청주성을 탈환하고 금산 연곤평 싸움에서 순절하기까지의 사적을 기록한 비문이다. 임진왜란 11년 후(1603년 4월)당시 해평부원군이었던 윤근수(尹根壽)가 글을 짓고 김현성(金玄成)의 글씨로 새겨 건립한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금산경찰서장 “이시까와 미찌오(石川道夫)”에 의해 폭파되었던 것을 주민들이 일제의 눈을 피하여 땅속에 묻어두었다가 8·15 광복 이후 파내어 보관하여 오던 중 1971년 경역 확장 시 그 폭파된 비를 붙여서 비각을 세우고 보존하여 내려왔다. 2009년 9월에 분리된 상태로 비각 안에 있었던 몸체와 머릿돌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여 다시 세웠으며, 비의 규모에 맞추어 비각도 목조양식으로 새롭게 개축하였다.

  • 의총문
  • 의총문(義塚門)

    칠백의총 정문에서 종용사로 들어서는 도중에 만나는 첫 문으로 칠백의총의 외삼문(外三門)에 해당한다. 의총문(義塚門)은 1971년에 실시된 제1차 정화 공사 때 새로 지어졌다.


    이 문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서 지붕은 맞배 지붕 철근 콘크리트조로 지어졌다.

  • 숭의지
  • 숭의지
  • 홍살문
  • 홍살문

    궁전, 관아, 능, 사당 등에 들어오는 길머리에 세우는 붉은 칠을 한 문이다. 사당의 경내를 표시하며 그 경건성을 유지하기 위한 성역임을 나타낸다.

  • 칠백의사순의탑
  • 칠백의사순의탑(七百義士殉義塔)

    1976년 칠백의사의 거룩한 뜻을 영원히 지켜가고자 칠백의총과 마주보는 위치이며 전적지인 연곤평이 내려다보이는 현 위치에 건립하였다. 13.8m의 탑신 전면에는 “칠백의사순의탑“이라 새겼고 탑신 하부는 화강암에 용이 새겨져 있으며, 탑신 상부에는 동(銅)으로 만든 창과 방패가 장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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